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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ball/Premier League

머지사이드 더비 역사에 대해

by TrentK 2020.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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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사이드 더비 역사 알아보자

머지사이드 더비 1

안녕하세요. 오늘은 머지사이드 더비 역사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다들 잉글랜드 클럽인 에버튼과 리버풀의 맞대결이 머지사이드 더비라고 불리는 것은 알고 있지요? 맞습니다. 리버풀에 연고지를 두고 있는 2개의 클럽인 에버튼과 리버풀 간에 펼쳐지는 지역 라이벌 매치입니다. 


머지사이드 더비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 두 팀이 머지사이드 주에 위치해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보시면 빨간색 경기장이 리버풀의 안필드, 그리고 파란색 경기장이 에버튼의 구디슨파크입니다. 양 경기장 중간에 있는 공원이 바로 스탠리 파크입니다. 


 머지사이드 더비는 경기장 내에서는 아주 치열하게 펼쳐지지만 프랜들리 더비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가족끼리도 리버풀 팬, 에버튼 팬으로 나뉘기도 하고 자선 더비 경기까지 치르기도 하기 떄문입니다. 하지만, 머지사이드 더비는 프리미어리그 더비 매치 중에서 옐로카드나 레드카드가 제일 많이 나오는 더비 이기도 합니다. 요즈음 들어서는 그렇게 더비 경기에서 레드카드를 보는 것이 조금 드물어졌습니다. 


 머지사이드 더비 2

그럼 에버튼과 리버풀의 머지사이드 더비는 어떻게 탄생하게 됐을까요? 


1884년, 안필드를 개장 시켰던 인물은 바로 존 오렐입니다. 존 오렐은 에버튼에게 안필드를 적은 임대료에 빌려주며 에버튼은 안필드를 홈구장으로 사용한 첫 팀이 되었습니다. 에버튼은 1884년 9월 25일에 안필드에서의 첫 친선 경기를 얼스타운과 치루었고 5-0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하지만 에버튼이 리그 우승을 한 1891년에 에버튼의 회장 자리에 있었던 존 하울딩이 친구인 존 오렐로부터 안필드를 사들이게 됩니다. 



머지사이드 더비 3

보수당이였던 존 하울딩은 다수의 자유당으로 구성된 에버튼 보드진들과 계속해서 의견 대립이 있었고 거기에 더해 안필드 임대료 인상 등을 요구하며 재정운영에 대한 의견 대립이 있었습니다. 결국 하울딩은 에버튼에게 안필드 사용 금지 명령을 내렸고 에버튼은 어쩔 수 없이 1892년에 미어그린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미어그린은 구디슨파크의 이전 이름입니다. 


머지사이드 더비 4

안필드에서 에버튼을 내보낸 존 하울딩은 직접 팀을 창단하게 됩니다. 그 팀이 바로 리버풀FC. 창단 당시, 존 하울딩은 에버튼FC & 애슬레틱 그라운즈라고 이름을 지었지만 축구협회에서 에버튼과 비슷한 이름을 가지고 창단할 수 없다고 하자 지역이름을 따 새롭게 이름을 리버풀FC 로 짓게 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에버튼과 리버풀은 좋지 않은 관계가 처음 탄생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894년 10월 13일에 첫 머지사이드 더비가 열렸으며 그 경기에서 에버튼은 리버풀을 3-0으로 꺾었습니다. 


1985년에 에버튼이 리버풀과 원수가 되는 사건이 하나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1984-85 시즌에 에버튼이 리그 우승을 차지했는데 리버풀 팬들이 유로피언컵 결승에서 엄청난 흑역사를 남기게 됩니다. 바로 헤이젤 참사죠. 해당 시즌에 리버풀은 유벤투스와 유러피언컵 결승을 치루게 되는데 리버풀은 당시 훌리건으로 유럽에 악명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리버풀 팬들이 있는 구역 옆에 중립 팬들의 자리였지만 여기에 유벤투스 팬들이 뒤섞이게 되면서 바로 옆 리버풀 팬들과 서로에 대한 야유와 욕설이 난무했습니다. 사이에는 쇠로 된 자그만한 경계 울타리가 있었지만 흥분한 리버풀 팬들은 울타리를 넘어 상대 서포터들에게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구역은 중립석으로 일반 관람객도 있었습니다. 리버풀 훌리건들의 공세에 사람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외곽 콘크리트 벽이 무너졌고 39명이 사망, 6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하는 축구 역사상, 그리고 리버풀 역사상 가장 큰 흑역사가 남게 됩니다. 


헤이젤 참사 사건으로 인해 UEFA는 잉글랜드 클럽 팀에게 향후 5년간 국제대회 출전 금지라는 중징계를 내렸고 리버풀에게는 향후 7년간 국제대회 출전 금지 징계를 내렸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아무 잘못이 없었던 에버튼은 리그 우승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 클럽 팀에게 내린 징계로 인해 유로피언컵에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리버풀에 대한 에버튼 팬들의 감정은 더욱 나빠지게 되었습니다. 



머지사이드 더비 5

그래도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공통적인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보면 치고 박고 싸우는 사이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힐즈버러 참사 사건이 있는데요. 힐즈버러 참사는 잉글랜드 셰필드에 있는 힐즈버러 스타디움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와의 FA컵 준결승이 열린 장소입니다. 좁은 공간에 너무 많은 인파가 몰려 킥오프 이후 96명이 압사하는 잉글랜드 국민들이 큰 충격을 받게 되는 사건 이였습니다. 


에버튼은 구디슨파크에서 뉴캐슬과의 경기가 열리는 날, 선수들 입장 시 두명의 꼬마 아이가 같이 입장하였습니다. 한명은 에버튼의 옷을, 한명은 리버풀의 옷을 입고 경기장을 밟았고 두 어린아이의 등번호는 각각 9와 6이였습니다. 이것은 힐즈버러 스타디움에서 사망한 96명을 추모하는 모습이였습니다. 


참고로 에버튼의 리빙 레전드의 레이턴 베인스는 뉴캐슬 전에서 골을 터트리고 이것이 힐즈버러 참사의 96명을 위한 골이라고 밝혔습니다. 그 96명 중에 레이턴 베인스의 아버지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 참사는 누구보다 남다를 것입니다. 


또 다른 사건으로 2007년에 총기사건으로 11살의 꼬마 에버튼 팬인 리스 존스가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리버풀은 피해자의 부모와 그 형을 챔피언스리그 경기가 열리는 안필드에 초대했습니다. 에버튼의 전통적인 노래인 Johnny Todd가 안필드에서 처음으로 연주되었으며 피해자의 가족은 에버튼 셔츠와 스카프를 입고 경기장에 섰습니다. 그들은 리버풀의 You'll Never Walk Alone 이 연주되기 전에 기립 박수를 받았습니다.  


리버풀에서 뛰었던 선수가 원래는 에버튼 팬이고, 에버튼에서 뛰었던 선수가 원래는 리버풀 팬인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리버풀의 캐러거와 마이클 오언 같은 경우, 어린시절부터 에버튼의 팬이였으며 리버풀 레전드, 스티븐 제라드의 사촌인 앤서니 제라드는 에버튼에서 뛴 적이 있습니다. 베인스 같은 경우는 아버지가 리버풀 팬이였고 어렸을 때 함께 리버풀을 응원했습니다. 


옛날에는 머지사이드 더비가 대등했지만 2010년대 들어서는 에버튼보다 리버풀이 확실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2010년부터 2019년까지 리버풀은 에버튼을 상대로 10승 10무 1패라는 아주 강력한 상대전적을 가지고 있으며 월등한 경기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2010년 10월에 리버풀을 상대로 2-0 승리를 거둔 에버튼은 이제 거의 10년 간 승리를 따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머지사이드 더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원수인 것 같으면서도 원수지간은 아닌 양 팀, 계속해서 멋진 대결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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